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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직후 전 세계 83개국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액션 영화 '발레리나'를 보고 나서, 솔직히 단순한 오락 영화로 소화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제 직장생활의 어느 순간과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복수를 위해 혼자 부딪히는 이브의 모습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혼자 답을 찾아야 했던 그때와 묘하게 닮아 있었습니다.

성장, 정답 없는 순간에 강해진다
영화 '발레리나'에서 이브는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능숙하게 해결하는 완성형 인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루스카 로마라는 조직 안에서 반복적인 훈련을 거치고,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부딪히면서 조금씩 자신만의 전투 방식을 만들어 갑니다. 특히 영화 속 훈련은 단순히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발레를 연상시키는 움직임과 코레오그래피(choreography)를 활용해 몸의 균형과 속도, 상대의 힘을 역으로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코레오그래피란 원래 무용에서 동작의 순서와 흐름을 구성하는 것을 뜻하는데, 영화에서는 이브라는 인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처럼 활용됩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떠올린 것은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경험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지금 생각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처음 맡아보는 업무 하나도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자세하게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고 마감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제가 잘못 처리하면 제 업무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정까지 밀릴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괜히 이 업무를 맡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전에 만들어진 자료를 찾아보고, 비슷한 사례를 하나씩 비교하면서 방법을 익혔습니다. 당연히 처음부터 매끄럽게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잘못 이해해 다시 수정하기도 했고,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마음이 급해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몇 번을 직접 부딪히고 나니 어느 순간 비슷한 업무가 들어와도 예전처럼 겁부터 나지는 않았습니다.
이브 역시 자신보다 체격이 큰 상대를 만났을 때 처음에는 힘에서 밀립니다. 그러나 계속 같은 방식으로 싸우기보다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영화에서 강조되는 "improvise, adapt"라는 말도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상황에 맞게 방법을 바꾸고 적응하라는 의미입니다.
직장에서도 결국 오래 남는 사람은 모든 정답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 방법을 찾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누군가에게 설명을 들었을 때보다 직접 실패하고 수정하면서 익힌 업무가 훨씬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브의 성장 과정은 단순히 강한 킬러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기보다,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였습니다.
복수, 목적이 강할수록 놓치는 것도 있다
이브를 움직이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감정은 복수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결국 자신이 속한 조직의 규칙까지 거슬러가며 과거의 진실을 추적하게 만듭니다. 이브에게 복수는 단순히 한 사람을 제거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왜 이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확인하고,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상처의 원인을 직접 마주하려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이브의 행동에 어느 정도 동의하게 됐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계속 외면한 채 살아가는 것보다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확인하려는 태도가 더 나은 선택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누군가가 대신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움직이며, 자신이 내린 선택의 결과까지 감당하려는 모습은 이브라는 인물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동시에 아쉬움도 느꼈습니다. 복수라는 목표가 워낙 강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다 보니 이브의 감정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순간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액션 영화의 특성상 전투 장면의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지만, 이브가 왜 이토록 위험한 선택을 반복하는지 감정적으로 조금 더 보여줬다면 인물에게 더 깊게 몰입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인물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고 표현합니다. 처음과 마지막의 인물이 어떤 사건을 거치면서 생각이나 행동 방식이 달라지는지를 의미합니다. '발레리나'에서도 이브는 분명 변합니다. 하지만 그 변화가 내면의 대사나 관계보다는 행동과 액션을 통해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영화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설명을 길게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속도감은 살아납니다. 반면 이브가 느끼는 상실감과 분노, 복수를 끝낸 뒤 남게 되는 감정을 좀 더 오래 보여줬다면 이야기가 더욱 묵직해졌을 것입니다.
현실에서도 한 가지 목표에 지나치게 매달리다 보면 다른 중요한 것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성과 하나만 바라보다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놓치거나, 실수를 만회하는 데만 집중하다 정작 더 중요한 방향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브의 복수 역시 목표가 너무 분명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동시에 다른 선택지를 바라볼 여유를 빼앗았다는 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남겼습니다.
생존, 결국 남는 것은 대응하는 힘이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이브에게는 준비된 계획보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더 많이 찾아옵니다. 상대는 많아지고, 가지고 있던 무기는 부족해지며, 처음 세운 계획대로 움직이기 어려운 순간이 계속됩니다. 이때 이브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능력은 강한 힘 자체가 아니라 상황에 맞춰 즉시 대응하는 능력입니다.
주변에 있는 물건을 무기로 활용하거나 상대의 움직임을 역으로 이용하는 장면들이 반복되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방식을 임프로바이제이션(improvisa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는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거나 대응한다는 의미인데, 영화 속에서는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해 해결책을 찾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직장생활과 가장 많이 겹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제 업무도 계획표처럼 정확하게 흘러가는 경우보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기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요청했던 자료가 늦게 도착하거나 갑자기 일정이 변경되는 경우도 있었고, 처음 보는 업무를 빠른 시간 안에 처리해야 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당황했습니다.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지'라는 생각도 했고, 누군가가 방법을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여러 번 겪다 보니 결국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준비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다시 방향을 잡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특히 직접 해결해 본 경험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전 자료를 찾아보고, 잘못된 부분을 비교하고, 혼자 방법을 고민했던 경험이 나중에 더 복잡한 업무를 맡았을 때 예상외로 큰 도움이 됐습니다. 누군가에게 한 번 설명을 듣는 것보다 스스로 부딪혀 해결한 일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브 역시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준비된 상황에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계속 계획이 틀어지고 예상하지 못한 상대가 나타나는 상황에서 자신의 판단으로 다음 행동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저는 '발레리나'의 핵심을 단순한 복수의 완성으로만 보기는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결국 이 영화에서 이브가 얻는 것은 특정한 상대를 쓰러뜨렸다는 결과만이 아닙니다. 누구도 자신을 대신해서 지켜주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익히게 됩니다. 성장과 복수, 생존이라는 세 가지 요소도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해 배우고, 이후에는 과거와 마주하기 위해 움직이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 됩니다.
직장생활 역시 규모만 다를 뿐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일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벅차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순간이 많아집니다. 결국 경력이라는 것도 모든 일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는 의미라기보다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발레리나'를 보고 난 뒤 가장 오래 남은 것은 화려한 액션보다 이브가 계속 상황에 적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처음부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