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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별 과제를 하던 날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선생님은 자유롭게 조를 구성하라고 했지만, 교실 안에서 보이지 않는 계급이 만들어지는 데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설국열차를 보면서 그 장면이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열차 안이나 교실 안이나, 공간이 달라도 불평등이 작동하는 방식은 놀랍도록 비슷했습니다.

계급구조, 칸이 나눈 삶
처음 ‘설국열차’를 보기 전에는 얼어붙은 지구를 달리는 열차 안에서 생존자들이 벌이는 SF 액션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니 가장 오래 남은 것은 화려한 전투 장면이 아니라 열차를 가로로 나눈 수많은 문이었습니다. 한 칸의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의 옷과 음식, 표정과 생활환경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모두가 같은 열차를 타고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지만, 어느 칸에 속했느냐에 따라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지가 결정됩니다.
영화는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대기권에 살포한 냉각 물질 CW-7이 예상보다 강력하게 작용하면서 지구 전체가 빙하기에 들어간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윌포드가 만든 거대한 열차에 탑승하지만, 재난이 기존의 경제적 차이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외부로 나갈 수 없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 불평등은 더욱 선명하고 고정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돈을 내고 탑승한 승객들은 앞쪽 칸에서 풍족한 음식과 교육, 음악과 오락을 누리는 반면, 무임승차한 사람들은 꼬리 칸에 갇혀 최소한의 배급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모습을 계급구조(Class Structure)라는 개념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계급구조란 경제력과 권력, 직업과 사회적 지위 등에 따라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위치에 놓이는 사회적 체계를 뜻합니다. 열차의 앞 칸과 꼬리 칸은 단순한 공간적 차이가 아닙니다. 앞 칸으로 갈수록 자원과 권한이 많아지고, 꼬리 칸으로 갈수록 선택권과 이동의 자유가 사라집니다. 열차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유롭게 바꾸기 어렵다는 사실은 계급이 한번 정해지면 쉽게 이동할 수 없는 현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학창 시절 조별 과제를 하면서도 이와 비슷한 구조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자유롭게 조를 구성하라고 하면 공부를 잘하고 발표에 자신 있는 친구들끼리 먼저 모였습니다. 평소 말수가 적거나 친구 관계가 넓지 않은 학생들은 마지막까지 남았다가 한 조가 되곤 했습니다. 같은 교실에서 같은 수업을 듣고 있었지만, 조를 정하는 짧은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 순서와 등급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제가 속한 조에서도 역할이 언제나 공평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소리가 크고 발표를 잘하는 친구가 주제를 결정하고 발표까지 맡았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에게는 꾸미는 일이 돌아갔고, 조용한 친구는 자료를 출력하거나 준비물을 챙기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당시에는 각자 잘하는 일을 나눈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누가 무엇을 잘하는지 충분히 확인하기 전에 기존 이미지에 따라 역할을 결정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말수가 적다는 이유로 의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중요한 역할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평소 발표할 때 목소리가 작아 늘 자료 정리를 맡았던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발표를 맡은 학생이 결석하면서 그 친구가 대신 앞에 서게 됐는데, 예상과 달리 내용을 차분하고 정확하게 설명했습니다.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 친구에게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능력을 보여줄 기회를 우리가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역할 분담이라는 익숙한 방식이 누군가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제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설국열차’의 꼬리 칸 사람들도 능력이 부족해서 그곳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거나 다른 삶을 선택할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열차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기술과 노동은 특정 사람들에게 요구되지만, 그에 합당한 권리와 존중은 제공되지 않습니다. 지배층은 각자의 자리가 정해져 있다고 말하며 현재의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질서처럼 설명합니다. 계급구조가 유지되는 핵심은 단순히 자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누가 자원을 배분하고 이동할 권리를 결정하는지에 있습니다.
물론 현실 사회의 계급구조는 영화처럼 앞 칸과 꼬리 칸으로 명확하게 나뉘지 않습니다. 교육과 소득, 주거환경과 가족 배경 등 여러 조건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개인의 노력으로 위치가 달라지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가 사회를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반박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열차라는 압축된 공간은 복잡한 불평등의 원리를 관객이 직관적으로 이해하도록 만든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본 뒤 공평하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 언제나 공평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출발점과 기회가 다른 상황에서 같은 기준만 제시하면 기존의 차이가 계속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국열차’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리와 역할이 정말 개인의 능력으로 결정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계급구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 묻는 작품입니다.
디스토피아, 질서로 포장된 억압
‘설국열차’가 보여주는 세상은 대표적인 디스토피아(Dystopia)입니다. 디스토피아란 이상적인 사회를 의미하는 유토피아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억압과 감시, 불평등이 일상화된 가상의 사회를 뜻합니다. 그러나 디스토피아 작품이 단순히 어둡고 절망적인 미래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문제를 극단적인 환경에 옮겨놓고, 익숙해서 지나쳤던 모순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설국열차의 외부는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추위로 얼어붙어 있습니다.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생명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열차의 규칙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윌포드는 이 절대적인 생존 조건을 이용해 자신이 만든 체제를 정당화합니다. 각 부품이 정해진 자리에 있어야 기계가 움직이듯, 사람도 태어난 칸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해야 열차가 유지된다는 논리입니다. 불평등은 지배자의 욕심이 아니라 모두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질서처럼 포장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헤게모니(Hegemony)라는 개념과 연결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헤게모니란 지배 집단이 물리적인 강제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가치와 질서를 사회 전체가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지배 방식을 의미합니다. 설국열차에서도 무장한 군인과 처벌은 중요한 통제 수단이지만, 그것만으로 체제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열차는 신성하며 윌포드는 인류를 구원한 존재라는 믿음을 반복해서 주입하기 때문에 불평등한 구조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학교 칸에서 아이들이 윌포드와 엔진을 찬양하는 장면은 이러한 통제 방식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노래와 영상, 교사의 설명을 통해 현재의 질서가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고 배웁니다. 다른 체제를 상상하기도 전에 윌포드가 만든 규칙을 자연의 법칙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공간인 동시에 지배 체제의 가치관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장치로 사용됩니다.
저도 학창 시절 규칙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경험이 있습니다. 조별 과제를 할 때 발표를 잘하는 학생이 발표하고, 글씨를 잘 쓰는 학생이 보고서를 정리하는 방식이 늘 반복됐습니다. 누구도 강제로 역할을 빼앗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 과제에서 맡았던 역할이 다음 과제에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조용한 친구가 발표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됐고, 저 역시 결과가 잘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그 구조를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모두에게 발표 기회를 주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시간이 부족하고 점수가 떨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현실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효율과 성과라는 말이 특정한 사람에게만 기회를 주는 방식을 정당화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명령하지 않아도 구성원들이 기존의 역할을 스스로 반복했다는 점에서 영화 속 질서와 닮아 있었습니다.
‘설국열차’ 속 메이슨 총리는 꼬리 칸 사람들에게 신발을 머리에 쓰지 않는 것처럼 각자에게 맞는 자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차별을 노골적인 혐오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기능의 차이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지배층은 자신들이 더 많은 자원을 누리는 이유를 특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열차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배치라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 억압받는 사람들조차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믿게 됩니다.
영화 속 열차는 식량과 물, 교육과 오락을 제공하며 마지막 인류를 보호합니다. 따라서 윌포드의 체제를 무조건 악으로만 규정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가능합니다. 제한된 자원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려면 일정한 규칙과 역할 분담이 필요하며, 모든 사람이 원하는 만큼 자원을 소비할 수는 없습니다. 외부 환경이 생존을 허락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강한 통제가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질서의 필요성 자체가 아니라 그 질서를 누가 결정하고, 그 과정이 공정하게 공개되는가에 있습니다. 꼬리 칸 사람들은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고 자신의 상황을 바꿀 기회도 갖지 못합니다. 지배층은 자신들의 풍요로운 생활을 유지하면서 희생은 아래쪽 사람들에게 집중시킵니다. 자원이 부족하다는 설명과 달리 앞 칸에는 사치와 오락을 위한 공간이 존재합니다. 결국 생존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을 위한 원칙이 아니라 기존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한 명분으로 사용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설국열차’의 가장 무서운 점은 악한 지배자 한 명이 사람들을 억압한다는 설정이 아닙니다. 불합리한 질서가 오랫동안 반복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역할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입니다. 디스토피아는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편리함과 효율을 이유로 작은 불평등을 묵인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영화는 질서를 지키라는 말 앞에서 누가 혜택을 얻고 누가 희생되는지 질문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혁명, 열차를 벗어나는 선택
‘설국열차’의 이야기는 꼬리 칸에서 시작된 혁명(Revolution)을 따라 전개됩니다. 혁명이란 기존의 정치·사회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급격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지배자의 얼굴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작동하는 구조와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을 새롭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영화 속 커티스와 꼬리 칸 사람들은 인간다운 삶을 되찾기 위해 앞쪽으로 이동하며, 자신들을 가로막는 문과 군인들을 차례로 넘어섭니다.
처음 커티스의 목표는 열차의 맨 앞에 있는 엔진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엔진을 통제하면 윌포드를 몰아내고 꼬리 칸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목표는 매우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열차 안에서 권력은 공간과 연결돼 있으며,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이 식량과 물, 병력과 정보를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꼬리 칸의 해방을 위해서는 지배 권력의 중심인 엔진을 차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커티스가 엔진에 가까워질수록 혁명의 의미는 복잡해집니다. 윌포드는 꼬리 칸의 반란이 자신과 길리엄 사이의 계획에 포함돼 있었다고 밝힙니다. 열차 안의 인구가 지나치게 증가하면 반란을 일으켜 일정한 수를 희생시키고, 그 과정을 통해 체제의 균형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억압에 맞선 저항마저 지배자가 설계한 인구 조절 장치였다는 사실은 커티스가 믿어온 혁명의 의미를 흔듭니다.
이 반전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체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저항이 언제든 기존 질서에 흡수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윌포드는 커티스에게 자신을 대신해 엔진을 관리하라고 제안합니다. 꼬리 칸의 지도자였던 커티스가 앞 칸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다면 인물은 달라지지만, 누군가의 희생으로 열차를 유지하는 구조는 그대로 남게 됩니다. 이것은 권력자를 교체하는 것과 권력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저도 조별 과제의 역할 분담을 바꿔보려 했던 경험을 통해 작은 규모로나마 비슷한 한계를 느낀 적이 있습니다. 매번 같은 학생만 발표하고 다른 친구들은 보조 역할을 맡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해, 다음 과제에서는 모든 사람이 한 번씩 의견을 말하도록 제안했습니다. 처음에는 이전보다 훨씬 공평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실제 토론이 시작되자 목소리가 큰 친구의 의견이 다시 중심이 됐고, 조용한 친구의 제안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금방 넘어갔습니다.
형식적인 규칙 하나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관계 속에 굳어진 분위기까지 곧바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말할 기회를 얻는 것과 그 의견이 같은 무게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이후에는 의견을 말하는 순서만 정할 것이 아니라, 나온 제안을 기록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함께 검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변화는 새로운 규칙을 선언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 방식이 반복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살피는 과정이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남궁민수는 커티스와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봅니다. 커티스가 엔진을 차지하려 한다면 남궁민수는 열차 자체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는 외부의 눈이 조금씩 녹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며, 열차 밖에서도 생존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커티스에게 문은 다음 칸으로 이동하기 위해 열어야 할 장애물이지만, 남궁민수에게 마지막으로 열어야 할 문은 열차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입니다.
이 차이는 영화가 혁명을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체제의 중심을 점령해 운영 방식을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체제의 전제를 거부하고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엔진을 차지하는 방식은 당장의 생존 기반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기존의 계급구조를 반복할 위험이 있습니다. 열차에서 벗어나는 방식은 근본적인 자유를 추구하지만, 안전과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열차가 폭발한 뒤 살아남은 요나와 티미가 밖으로 나가는 결말은 이러한 질문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두 사람은 멀리 있는 북극곰을 발견합니다. 북극곰의 존재는 외부 세계에 생명이 살아 있으며 인간도 생존할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무기나 식량이 충분하지 않은 두 아이가 혹독한 자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도 남습니다. 열차의 파괴를 해방으로 볼 수도 있지만, 생존 대책이 준비되지 않은 급격한 변화가 더 큰 희생을 불러온 선택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결말이 혁명의 정답을 제시한다기보다 관객에게 판단을 맡긴다고 생각합니다. 부당한 체제라도 생존을 보장한다면 그 안에서 개혁해야 하는지, 아니면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완전히 벗어나야 하는지 쉽게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도 급격한 변화는 새로운 기회를 만들지만 혼란과 피해를 함께 가져올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안정만을 강조하면 오래된 불평등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설국열차’는 앞 칸에 도착하는 것을 혁명의 완성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가 엔진을 차지하든 열차가 계속 달리는 한 누군가는 작은 부품이 되어 희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변화는 지배자의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믿음부터 의심하는 데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영화를 본 뒤 저는 일상에서 변화를 말할 때 사람만 바꾸려 하는지, 아니면 불공평한 결과를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구조까지 살피고 있는지 돌아보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