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남한과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목숨을 걸고 함께 탈출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처음 이 사실을 접했을 때 저도 반신반의했습니다. 서로를 감시하고 외교 경쟁을 벌이던 두 대사관이 같은 차를 타고 총탄을 뚫고 달렸다는 게 쉽게 그려지지 않았거든요. 남북협력, 생존을 위한 선택영화 ‘모가디슈’는 1991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를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대한민국과 북한은 유엔 가입을 앞두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치열한 외교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남한과 북한 모두 자신들이 한반도를 대표하는 정통 국가라는 점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기 때문에, 소말리아에서 마주친 양측 외교관들은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반드시 앞서야 할 경쟁자에 가까웠습니다. 상대보..
터널 안에 갇혀 있다고 상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빛도 없고, 소리도 없고, 구조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버텼을까. 저는 영화 터널을 보면서 내내 그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습니다. 극한 생존, 사회 구조의 민낯, 그리고 희망이라는 감정이 동시에 한 화면 안에 담긴 영화였습니다. 희망이 버티게 하는 힘영화 ‘터널’은 자동차 영업대리점 과장 정수가 퇴근길에 무너진 터널 안에 갇히면서 시작됩니다. 평소처럼 주유소에 들렀다가 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집으로 향하던 평범한 하루였습니다. 그러나 새로 개통한 터널이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정수의 일상도 함께 멈춰 버립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휴대전화와 생수 두 병, 딸에게 줄 생일 케이크뿐입니다. 구조대가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고 추가 붕괴..
같은 팀이었던 사람이 위기 앞에서 갑자기 모르는 사람처럼 구는 걸 목격한 적 있으십니까. 저는 학창 시절 조별 과제에서 그런 순간을 겪고 나서, 꽤 오랫동안 그 기억이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영화 해무를 보면서 그 감각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영화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사람이 얼마나 빠르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꽤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극한 상황이 바꾼 선택영화 ‘해무’는 2001년 발생한 제7태창호 사건을 모티프로 제작된 작품입니다. 봉준호 감독과 심성보 감독이 각본을 맡았고, 심성보 감독이 연출해 2014년 개봉했습니다. 영화의 주요 배경은 한때 풍족한 어획량을 자랑했지만 이제는 낡고 초라해진 어선 전진호입니다. 선장 철주에게 전진호는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바다에..
일이 한꺼번에 몰려들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퇴근하고 나면 머릿속이 이미 다음 날 걱정으로 가득 찼고, 그 상태에서 내린 결정들이 하나같이 뒤통수를 쳤습니다. 영화 '황해'를 보면서 그 시절 제 감각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구남이라는 인물이 내리는 선택 하나하나가, 생각보다 훨씬 낯설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절박한 선택이 부른 비극영화 ‘황해’에서 구남은 처음부터 범죄를 계획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연변에서 택시를 운전하며 살아가지만, 아내를 한국으로 보내기 위해 마련한 돈 때문에 큰 빚을 떠안게 됩니다. 한국으로 떠난 아내와는 연락마저 끊기고, 빚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삶을 압박합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은 도박판에서도 돈을 잃으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집니다. 그런 구남에게 면정학은 한국에..
교도소 수감자가 외부 범죄 조직을 지휘하며 억대 수익을 올린다. 이 설정이 영화적 과장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국내 교정 시설 내 조직 범죄 관련 징계 건수는 매년 수백 건에 달합니다. 영화 프리즌을 보고 나서 제 머릿속에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은 화려한 액션이 아니라,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그 고요함이었습니다.침묵의 공범이 만든 질서영화 ‘프리즌’에서 성안교도소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교도소장이 아니라 수감자 정익호입니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다른 수감자들을 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밤이 되면 자신이 선택한 수감자들을 밖으로 내보내 범죄를 저지르게 합니다. 교도소는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교화해야 하는 공간이지만, 영화 속 성안교도소는 새로운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장소로 변해 있습니다..
친구라면 뭐든 다 알아야 한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오래된 친구 모임에 나가 보면, 서로 아는 척은 하면서도 정작 지금 각자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화 '완벽한 타인'은 바로 그 어색한 틈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작품입니다. 저도 이 영화를 보면서 친구라는 관계의 실체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인간관계를 비추는 스마트폰영화 ‘완벽한 타인’은 2018년에 개봉한 한국 영화로, 2016년 이탈리아 영화 ‘퍼펙트 스트레인저’를 한국 정서에 맞게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리메이크란 기존 작품의 기본적인 이야기와 설정을 가져오되, 제작되는 나라의 문화와 정서에 맞게 인물과 대사 등을 새롭게 만드는 방식을 말합니다. 같은 이야기를 다루더라도 어떤 사회를 배경으로 삼느..
확인되지 않은 소문 하나가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 저는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영화 누룩은 바로 그 지점을 정확하게 건드리는 작품입니다. 18세 소녀가 누룩을 찾아 헤매는 이야기가 어떻게 공동체의 심리 구조를 해부하는 영화로 이어지는지, 제 경험과 함께 짚어봤습니다. 집단심리가 만들어낸 다슬에 대한 오해영화 '누룩'은 양조장집 딸 다슬이 아버지가 만든 전통 누룩 막걸리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고등학생이 막걸리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독특한 설정처럼 보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다슬의 행동에는 단순한 음주 습관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영화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한 사람의 행동이 주변의 시선과 집단..
막다른 곳에 몰렸을 때, 당신이 손을 내민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영화 '프로젝트 Y'는 화류계를 배경으로 두 여자가 살아남기 위해 범죄에 발을 들이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었는데, 그 이유가 단순히 스릴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이 지나치게 낯설지 않아서였습니다. 승부조작, 숫자 하나로 사람의 인생을 흔드는 구조영화 ‘프로젝트 Y’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범죄 장치는 승부조작입니다. 승부조작이란 스포츠 경기의 결과나 특정 상황을 사전에 정해놓고, 그 정보를 이용해 불법 베팅 시장에서 이익을 얻는 행위를 말합니다. 단순히 선수가 일부러 경기에서 지는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경기 결과를 설계하는 사람, 선수를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사람, 조작 정보를 판..
사회 초년생 시절, 저는 더 좋은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가 눈앞에 있었는데도 "괜히 나섰다가 망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 하나로 스스로 물러섰습니다. 그 프로젝트가 나중에 좋은 성과를 냈을 때, 자연스럽게 "그때 뛰어들었으면 어땠을까"라는 가정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영화 '만약에 우리'를 보면서 그 감각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영화는 지나간 선택 앞에서 누구나 한 번쯤 멈춰 섰을 그 순간을 아주 정직하게 들여다봅니다. 선택의 맥락, 태풍이 이어준 두 사람의 재회영화 '만약에 우리'는 2024년 호치민 공항에서 시작됩니다.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던 정원과 은호는 우연히 다시 만나고, 태풍 캐슬린으로 모든 항공편이 결항되면서 예상하지 못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됩니다. 겉으로 보면 로맨스 영화에서..
1월 14일 개봉한 영화 '보이'는 이미 스페인 판타지아 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된 작품입니다.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 "우리나라 영화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적인 느낌이었고, 그게 오히려 보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이어졌습니다. 착취구조, 반복되는 노동과 소비의 굴레영화 보이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독특한 세계관보다 그 안에서 너무도 당연하게 반복되는 착취구조였습니다. 사회 시스템이 붕괴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형 기환과 동생 로한은 '텍사스 온천'이라는 공간에서 노동자들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합니다.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노동을 하고 임금을 받지만, 그 돈은 다시 '개미굴'이라는 공간에서 술과 마약, 도박 같은 쾌락으로 모두 소비됩니다. 결국 노동으로 번 돈이 다시 같은 시스템 안으로 흘러..